寫眞/사진을 잘 찍으려면..?

살아있는 전설 매그넘 작가들의 사진세계

NPNG 2007. 3. 15. 13:36
 

매그넘 풍경사진


살아있는 전설, 로버트 카파(Robert Capa)와 앙리 카르티에-브레송(Henri Cartier-Bresson)의 후예들이 지금 오고 있다. 신화를 창조하는 세계 최고 사진작가 모임인 매그넘(Magnum)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매그넘 풍경 사진전은 우리가 알고있는 풍경사진과 상이하다. 우리는 매력적이거나 아름다움을 담은 풍경 사진을 접해왔다. 그러한 사진들은 관광객의 시선을 모으고 불러들이는 관광산업과 관련이 깊다. 관광 엽서, 광택나는 인쇄매체에 실린 풍경사진의 경관 예찬은 대규모 관광산업에 헌신한다. 그러나 매그넘의 풍경사진은 인류에 의해 변화하는 대지, 환경, 지구를 향한 자각과 인류가 당연시해온 풍경에 관한 관념에 파문을 불러일으킨다. 그들의 사진 작업은 단순한 관찰이 아니라 참여인 것이다.  매그넘이 지난 56년에 걸쳐 기록한 방대한 사진서고에서 엄선된 120여 작품의 풍경사진은 크게 5가지로 분류되어진다. 풍경바라보기, 실재하는 풍경, 재발견된 풍경, 전쟁 풍경, 풍경 속의 주연, 인간이 바로 그것이다. 본 전시 작품은 한 장의 사진 속에 인간과 자연을 밀접히 관련시켜 풍경의 재발견은 물론 자연과 인류에 관하여 더욱 심오하게 사색할 수 있는 문화의 장을 펼쳐 보인다.  


1. 풍경 바라보기
풍경을 바라보는 이의 관점에 의해 구성되어진 풍경사진을 들 수 있다. 인간의 풍경바라보기는 영적인 경험이며 문화의 반영이다. 경관을 명상하는 사람은 풍경과 조화를 이루며 자연 그 자체와 연루관계에 놓여있다. Robert Runcie의 말처럼 중세시대 중세인은 그들의 종교 때문에 여행자가 되었지만 오늘날  현대인은 관광이 그들의 종교가 되었기 때문에 여행자가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2. 실재하는 풍경
어느 지역과 그 지역의 아름다움을 여행하고 발견하고자 하는 동경은 사진의 응시를 통해 강화된다. 예로, 미서부, 알프스산맥, 나일강 등을 들 수 있다. 풍경사진 애호가들이 느끼는 감정적인 떨림은 사진적인 요소를 구성하는 사진작가의 시각 덕택으로 여겨진다. 미광을 발하는 토파즈(황옥)같은 빛의 상태 독특한 분위기의 신기루, 시간의 흐름에 따른 공기층의 변화 등은 경이롭다.


3. 재발견된 풍경
사진작가들의 시선은 건설하고 파괴하기에 바쁜 현대사회의 시각적인 기호와 메시지를 잡는다. 산업의 제재와 그 파편은 현대 사회의 형상이며 인류에 의한 조각품이다. 한편 우리들은 길가, 차도, 인도에서 미로를, 풍치를 더하는 기하학적인 도형의 패턴을, 사람, 동물, 물체의 갑작스런 출현에 의한 디자인적인 요소를 재발견한다.


4. 전쟁풍경
매그넘은 전쟁으로부터 태어나서 지난 50여 년 동안 전쟁의 목격자로 남아 왔다. 매그넘의 창립자인  로버트 카파는 베트남에서 순찰 취재 중 지뢰를 밟아 유명을 달리했고 다른 창립자인 데이비드 세이무어는 수에즈 전선에서 이집트군의 기총 소사를 맞고 최후를 맞았다. 매그넘은 전쟁터를 앞서가거나 뒤따르면서 전쟁을 폭로해 왔다. 전쟁터의 참화로 일그러진 도시, 국경지대의 난민 등 전쟁에 관한 덧없는 풍경은 유린에 대한 기억이자 평화를 갈구하는 장소이다.

5. 풍경 속의 주역, 인간
풍경사진 속의 인간은 엑스트라가 아니라 주인공이다. 그들의 땅, 그들 노동의 소산, 그들의 여정에서 주역이어야 한다. 나아가 역사, 농경, 경제, 관념적인 분야까지..... 인류는 때때로 혼란과 불안, 때때로 유토피아와 조화를 창조하는 주연 배우이다.  

매그넘의 풍경사진들은 독특한 개인적인 스타일로 기록되고 해석되고 재발견되었다. 사진의 스타일은 사진작가가 가진 독특한 표현법을 지칭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매그넘의 사진작가들은 리포터라기보다 작가에 가깝다. 그리고 풍경사진의 주제는 현존하는 시대와 공감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다. 전쟁의 풍경, 농경의 풍경, 산업화의 풍경, 도시의 풍경, 고속도로의 풍경, 폐허의 풍경 등이 그것이다. 이렇듯 매그넘의 시대정신이 풍경사진에서도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매그넘의 역사적 고찰 - 이기명

1. 머리말  
       
매그넘의 사진가들은 동료 사진가들을 ‘위대한 사진가(great photographer)’라고 지칭한다. 사실, 매그넘의 정회원들은 스스로 위대한 사진가라고 자임하고 있을지 모른다. 저널리즘 사진이나 다큐멘터리 사진 분야에서 정상을 달리고 있는 사진가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 단체의 현재 혹은 전 멤버이기 때문이다. Josef Koudelka, Bruce Davidson, Gilles Peress, AlexWebb, Martin Parr, Sebastia'o Salgado, Eugene Richard, James Nachtwey, 등 수많은 슈퍼 스타 들이 그들이라 하겠다. 매그넘의 임무는 본질적으로 신뢰하고자 노력하는 진보적이고 도덕적인 보편성의 도상 기호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런 신념을 바탕으로 매그넘은 기록의 도덕적 힘에 헌신하고 있다. 매그넘의 사진은 타자 간의 거리, 들리는 비명소리와 들리지 않는 비명소리의 거리, 도움을 받은 손과 도움을 받지 못한 손의 거리를 기록해 오고 있다. 매그넘의 사진 덕택으로, 지난 50여년에 걸쳐 안전 지대와 위험 지대의 윤리적 거리가 시각적으로 증언될 수 있었다. 여기에서 매그넘의 창립에서 오늘에 이르는 그들의 활동을 조명해 봄으로써 매그넘사진사적 의미를 되짚어 보고자 한다.


2. 매그넘의 창립

1945년 전쟁에서 돌아온 사진가들은 완전한 무력감에 빠져 들었다. 그들은 냉전이라는 정치적 분단에 적응해야 했으며 평화로운 시기에 사진이 자유를 지킬 수 있는 방편이 될 수 있다는확신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1947년 Robert Capa의 주도하에 Henri Cartier-Bresson, George Rodger, David "Chim" Seymour는 협동 작업을 꾀할 수 있는 에이전시를 만들기에 이러렀다.     그들은 편집장으로 부터의 독립과 자신이 촬영한 필름에 대한 사용권과 그들 자신의 어사인먼트를 선택할 자유를 보장받고 자신의 개성을 사진에 반영하기 위해 매그넘을 창립하였다.
매그넘은 사실, 사진 에이전시 가운데 전환점이 되었다. 왜냐하면 매그넘은 사진가 자신이 주체였으며 그들의 사진을 스스로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그들은 사진가가 저작권자가 되기위해, 사진을 지키기 위해 싸운 것이다. 특히 매그넘 사진가의 개성이란 지금까지도 지속적으로 매그넘을 정의해오고 있는 것으로 리포터와 예술가의 융합을 말한다. 그들 사진의 특징은 특정 사건에 대한 객관적인 기록의 성격을 띠고 있으면서도 사진가의 시각이 강하게 들어 있다는 점이다. Henri Cartier-Bresson이 하나의 기사에 접근하는 표준 척도가 없다라고 말했듯이, 본 것 뿐만 아니라 보는 방법에 강조점을 두어 피사체 못지않게 묘사되어지는 방법에 의해 의미가 바뀌어질 수 있음을 간파했다. 사진 에이전시임에도 불구하고 Henri Cartier-Bresson이나 Elliott Erwitt, Ernst Hass 등 예술 사진가들이 동참할 수 있었던 연유도 여기에 있었다. 특히 Henri Cartier-Bresson는 초현실주의 미술 세계 출신이었다. 이렇듯 매그넘의 이상은 기록을 예술 단계로 끌어올린다는 한층 더 높은 것이었다.
또한 4명의 창립자는 매그넘이 ‘상황(situation)과 진실(truth)을 환기’시킬 수 있기를 원했다. 그들은 강렬하게 세계 역사의 주요 양상들을 목격하고 세상의 불공정과 위대한 순간들을 나머지 인류에게 보여 줄 수 있기를 갈망했다. 매그넘의 윤리가 된 매그넘의 미학은 인간이 터무니없는 생각을 보다 적게 말하게 하고 사람의 말과 감정이 현실에 보다 적합해질 수 있도록  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3. 매그넘의 창립자

매그넘의 첫 번째 작업은 세계를 분할하여 촬영하는 것이었다. Chim이 유럽을, Cartier-Bresson이 인도와 극동을, George가 아프리카를, Capa는 소련을 촬영했다. 매그넘 사진가들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들 자신의 작업에 관한 선택과 그 작업에 필요한 시간에 대해 자율성을 가지는 것이었다.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출판물이나 출판사의 편집자들의 지시를 따르는 것을 원치 않았다. 사진가는 이미지에 있어서 동시대 사건의 전형적인 기록 차원을 초월하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사진가로서의 주체성과 자유를 확보하는 것이 4명의 창립자들의 염원이기도 했다.  

1) Robert Capa & Henri Cartier-Bresson
Robert Capa와 Henri Cartier-Bresson은 서로 다르지만 상호 보완적인 방법으로 인생의 진실을 찾고자 했다. Robert Capa의 사진이 본능적이고 감정 이입이 강하다면 Cartier-Bresson의 세계는 초현실주의와 유사하며 춤을 추는 듯 유연하다.
Capa는 스스로를 리포터라고 생각했다. 특히 5차례나 전쟁 사진가로 종군, 취재하여 저널리스틱한 유산을 주요하게 확립시켰다. Capa와 달리, 미술계로부터 사진계로 옮겨온 Henri Cartier-Bresson는 초현실주의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으며 예술성을 강조하였다.
매그넘 사진가의 개성으로 매그넘을 정의해오고 있는 리포터와 예술가의 융합은 바로 Robert Capa와 Henri Cartier-Bresson의 결합에서 비롯되었다. 매그넘은 저널리즘과 예술 사이의 충돌, 현실과 초현실 사이의 충돌, Capa와 Cartier-Bresson 사이의 충돌 속에서 발전해 온 것이다.
 
(1) Robert Capa
헝가리 출신 유대인, Robert Capa(본명은 Andre Friedmann)는 청소년 시절에 양재사였다. 그는 17세되던 해에 공산주의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헝가리를 떠나야 했다. 그가 1931년에 베를린 으로 이주한 것은 부다페스트에서 반유태주의 분위기를 피해 온건 좌파와 반정부 활동을 하고자 함이었다. 그는 베를린에서 정치학을 공부했지만 곧바로 농경과 언론 분야에서 경력을 쌓기위해 데포 통신사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민자로서 언어의 한계에 직면했던 Capa는 저널리즘에 가장 가깝게 접근하기위해 사진을 선택하기에 이르렀다. 사진가의 길을 숙명으로 받아들인 후 젊은 이민자에게 더 이상의 다른 선택은 없었다. 그는 사진을 찍으면서 최후의 순간을 맞았다.  
 
(가) Robert Capa의 성공
처음 인쇄된 Capa의 사진은 망명하여 코펜하겐에서 열띤 연설을 하는 스탈린의 정적, 레온 트로츠키의 사진이었다. 하지만 세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36년, 스페인 내전 당시 참호에서 뛰쳐나와 총을 든 채 머리에 총을 맞고 죽어가는 반 프랑코측의 한 병사를 촬영한 사진(사진1)이 뷰지(36년 9월 23일호)와 라이프지(37년 7월 12일호)와 픽처 포스트지 등에 게재되면서 부터였다. 이 사진은 전쟁터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상징하는 사진으로 저널리즘 사진의 신화로서 자리매김을 하였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시대적 환경과 매체 환경의 변화이다. 당시 파쇼와 반 파쇼 세력간의 대결이 극한을 향해 치닫고 있었고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독일의 망명 언론인들의 주도하에 사진 중심의 저널들이 발행되던 시기였다. 게다가 뷰지, 라이프지, 픽처 포스트 같은 잡지들이 스페인 내전을 전면에 걸쳐 사진으로  게재하고 사진가들이 제공하는 서사구조의 캡션을 함께 싣는 등 사진과 사진가의 의견을 보다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카메라, 렌즈, 필름 등 독일이 성취한 기술 발전의 덕택으로 1920 ~ 30년대 사진저널리즘이 가장 융성한 국가는 독일이었다. 그러나 히틀러가 정권을 잡고 유태인을 탄압하면서 언론사 소속의 언론인들도 속속 독일을 망명하였다. 그 가운데 뮌흐너지의 편집차장이었던 Stefan Lorant와 뮌흐너지와 베를리너지의 기고 사진가였던 펠릭스 H만이 런던으로 가서 위클리 일러스트레이티드지(1934년)와 픽처 포스트지(1938년)의 성공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가장 미국적인 라이프지의 창간조차도 사진가 Martin Munkacsi와 Alfred Eisenstaedt와 베를리너지의 편집장 등 독일 망명객의 영향하에서 이루어졌다. 그래서 이런 말이 회자한 적이 있다. “라이프지는 Henry Lous(타임사 사주)가 만든 것이 아니라 히틀러가 만든 것이다.” 1936년 11월 19일에 창간된 라이프의 첫호는 46만 6천 부가 팔리는 등 사진 저널리즘의 새 시대를 예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Capa는 매체 환경 변화의 큰 소용돌이 속에서 행운을 잡은 셈이다. Capa는 전쟁터의 사실적 묘사와 그로인한 군인과 시민에 미치는 엄청난 충격 모두를 충분히 소화해 내었다. 그의 사진은 사진사 속에서 사실성, 현장성, 직접성이라는 사진미학으로 해석되어지고 있다.
초기 사진 저널리즘 시대에서 사진의 보도적인 힘에 대한 놀람과 강렬한 인식을 던져준 사진은 Capa의 스페인 내전 사진으로 보아야 한다. 이 사진을 게재한 영국의 픽처 포스트지는 ‘이것이 전쟁이다’라는 제목과 함께 지금까지 촬영된 최전선의 사진 중 최고의 사진이라며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캡션은 이렇게 적고 있다. “당신은 이 사진에서 무기의 화약 냄새를 거의 맡을 수 있다” 사실 카파는 현장에 너무 가까이 접근했기 때문에 사진을 보는 편집인들과 독자들은 폭발음을 들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전쟁사진가로 불려지게 되었으며 그의 사진은 너무나 생생하다는 격찬을 받게 되었다.
Capa의 이상은 가능한 한 가까이 접근하는 것이었다. “만약 당신의 사진이 충분하게 만족스럽지 않다면, 당신은 충분히 가까이 가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카파이즘의 전형이 되었다. 덧붙여 그는 “이 말의 의미는 감정적 측면과 육체적인 측면 양쪽 모두에서 해석되어 질 것이다”라고 언급하였다. Capa의 예술가로서의 욕구와 사진기자로서의 욕구라는 반대 성향이 한 쌍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친우인 어네스트 헤밍웨이처럼 Capa도 위험을 즐기는 사진기자 인양 행동하곤 했지만 사실 헤밍웨이처럼 복잡하고 미묘한 예술가였다. 위험에 가까이 접근하려는 욕구 덕분에 사진이 형식주의의에 빠지지 않았고, 구성에 관한 타고난 시각 덕분에 매체 사진의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 Capa의 유명작과 최후의 사진  
Capa의 유명한 작품인, 딸의 손을 잡고 하늘을 바라보는 빌바오 여인의 사진은 불길한, 아직 보이지 않는 전쟁의 미래로 향하는 길을 가리키는 것 처럼 보였다. 그 여인이 하늘을 바라볼 때 우리는 함부르그와 드레스덴, 히로시마를 볼 수 있다. 노르망디 해변에 상륙하는 군인을 촬영한 사진은 초점이 나간 채 흔들려 있다. 이 사진은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성공할지도 실패할지도 모르는 불확실한 순간을 잡은 장면으로 현장의 군인도 Capa도 빗발치는 폭탄 속에서 떨고 있는 전율의 순간이기도 하다.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노르망디 상륙작전, 파리해방과 수많은 전쟁사진을 촬영한 Capa는 전쟁이 미화되는 것을 공격해 왔지만 정작 자신은 전쟁없이 살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1954년 그는 베트남으로 갔다. 5월 25일, 논에서 프랑스 군인들과 순찰 취재 중 지뢰를 밟았고 카메라 속에 마지막으로 찍은 필름들을 남겨둔 채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매그넘의 설립자 중의 한사람인, George Rodger는 동료이자 에이전시의 정력적인 지도자였던 Capa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는 사용하기에 보다 빠르고 한결 조용한 소형 카메라의 독특한 우수성을 인식했으며 전쟁터에서 수반되어온 온갖 감정의 쌍곡선과 더불어 수년에 걸쳐 우리 스스로가 얻어낸 양질의 작업을 직시하고 있었다”. Capa는 초소형의 카메라와 초대형 정신의 결합을 통해 인간을 위한 미래를 보고자 하였다. 그는 2차 세계대전이후 사진가의 역할을 그리고 있었다. 보다 소형화되고 휴대가 간편해진 카메라와 감광도가 빨라진 필름의 발명 그리고 사진가 정신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 나가고자 했던 것이다. Capa의 용기와 지성과 사진적 스타일-직접적이며 흥분을 야기시키고 내면적이고 감정이입이 강한-은 새롭고 호기심이 많은 독자층에게 이상(ideal)이었다. 전쟁의 비참한 현실을 강조, 표현하기위해 누구보다 애썼던 Capa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휴머니스트가 아닐까 싶다.  


(2) Henri Cartier-Bresson  
Henri Cartier-Bresson은 1908년 섬유업을 하는 프랑스의 부유한 상업 계층 출신이었다. 그는 개인의 직관과 초현실주의의 운동의 출현에 기인한 반제도의 저항적인 태도에 매료되어 있었다. 한편 폭넓은 (Engels, Freud, Joyce, Rimbaud, Saint-Simon, Schopenhauer 등) 독서와 몇몇 선생님을 모셔 회화를 수학했다. 1930년 22세때 아프리카 여행을 떠났는데, 귀로에 마르세이유에 들려 우연히 라이카 카메라를 발견하고서 매력을 느꼈다. 그후 “소형 카메라는 내 눈의 연장이다. 그때부터 내 곁을 떠난일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Cartier-Bresson과 함께 했다. 사실 소형이며 조용한 35mm 레인지 파인더형의 라이카는 이후 매그넘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왔다.

(가) Henri Cartier-Bresson의 결정적 순간(The Decisive Moment)  
Cartier-Bresson는 거리에서 촬영했다. 그의 작업 전반기에 “단편적인 찰나 내에서 시각적인 응집을 발견하였는데 스스로 ‘눈에 의한 고유의 통합요소’라고 불렸다. 그의 사진(사진2)은 즉각성과 복잡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했고 시각적인 기하학과 서사 구조를 회피하였다. 그는 1952년 ‘결정적 순간(The Decisive Moment)’으로 불리는 사진에 있어서 새로운 유연성에 관해 서술한 바 있다.
촬영 대상의 움직임에 의해 만들어지는 순간적인 윤곽의 생성이 있다. 우리는 마치 삶의 전개에 있어서 예감적인 방법이 있듯이 움직임의 조화속에서 작업한다. 그러나 내적인 움직임은 동작 요소들 간의 균형잡힌 한 순간 밖에 없다. 사진 촬영은 이 순간을 포착해야만 하고 그것의 평형상태에서 고정된 때를 잡아야 한다. 사진은 어떤 사실의 의미와 그 사실을 시각적으로 설명하고 가리키는 형태의 엄격한 구성이 한 순간에 동시에 인지된다는 것이다. 그는 현실의 세계가 생생한 빛을 띠고, 명암과 형태가 있는 장소에 꼭 자리잡는 순간을 쉽게 포착하여 제시하였으며 그의 사진 형식은 다큐멘터리 사진가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Cartier-Bresson은 회화를 차츰 멀리하면서 사진에 깊이 빠져들어갔다. 눈의 연장으로 인식한 소형카메라의 메카니즘을 최대한 활용하여 눈으로 인식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을 사진적으로 포착해 나간 것이다. 그는 “나는 회화와 결별하면서부터 내 나름의 참다운 사진을 찍게 되었다”고 술회했다. 이것은 바로 회화 구도와 사진 구도의 다른점에 대한 자각이었다.

(나) 인간 시인, Henri Cartier-Bresson
“우리는 종종 뉴스라 불리는 사건을 촬영한다”고 Cartier-Bresson이 1957년에 Popular Photography의 Byron Dobell에게 말했다. 그는 이어서 “그러나 어떤 이들은 뉴스를 마치 회계사의 장부처럼 상세히 하나하나 나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불행하게도 언론 매체에 종사하는 사진가들은 대부분 범속한 방식으로 사건에 접근한다. 그것은 어느 역사가에 의해 저술된 워터루 전투의 세부사항을 읽는 것과 같다 : 수많은 무기들이 거기에 있었고 수많은 군인들이 부상을 당했다. 당신은 세부 항목의 셈에 관해 읽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만약 당신이 Stendhal의 Charterhouse of Parma를 읽게 된다면 당신은 전쟁의 내부로 들어가서 작으나 의미있는 세부사항을 향유한다..... 인생은 애플 파이처럼 잘려진 단편같은 기사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기사 접근에 있어서 보편적인 방법은 없다. 우리는 상황(situation), 진실(truth),을 불러일으켜야만 한다. 이것은 인생의 리얼리티에 관한 시이다”
Cartier-Bresson는 2차 대전 중에 프랑스 영화사진반원으로 종군 활동하다가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전쟁기간중에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세 번의 시도 끝에 탈출하여 프랑스 레지스탕스로 활동을 하면서 강한 인간애를 체험할 수 있었다. 그는 인간애의 뜨거운 관심이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바로 그의 사진 철학이다. 그의 작품 구석 구석은 휴먼인터레스트로 가득히 스며 있다. 그는 강렬한 휴먼리스트이다.


  2)David "Chim" Seymour & George Rodger
  (1)David "Chim" Seymour
폴란드 출신 David "Chim" Seymour는 나치에 의해 그의 부모를 잃었다. 그의 아버지는 Hebrew와 Yiddish 책의 출판업자였다. 파리로 옮긴 Chim은 솔로몬드 대학에서 사진화학을 전공한 뒤 포토저널리스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40년 국적을 미국으로 바꾸고 2차 대전 기간동안 군인으로 활약하면서 사진을 포기하다시피 하였으나 전후 유네스코의 요청으로 다시 카메라를 들었다. 새 프로젝터는 유럽의 어린이들이 겪고 있는 전쟁의 아픔을 기록하는 것으로 특히 부상이나 고아가 된 아동에 초점을 맞추었다(사진3). 전쟁 고아에 관한 사진 가운데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어느 폴란드 고아에 관한 사진은 유명하다. 그 소녀는 자신의 세계를 표현하고자 마구잡이로 원을 그려놓은 칠판 앞에 서 있다. 칠판에 그려진 들쭉날쭉한 선과 소녀의 표정은 그를 불쌍히 여기는 타인이 그녀의 내면 세계에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 하다.
교양있고 겸손하며 잘 익은 포도주와 맛나는 음식을 좋아했던 Chim은 조용한 감성, 재해의 고통에 대한 인식과 타자의 인간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사진작업에 임했다. 마치 무감각의 세계에 보다 현저한 질서를 복원이라도 할 듯이. “Chim은 의사가 가방에서 청진기를 꺼내듯이 카메라를 들었다”라고 Cartier-Bresson은 적고 있다. “심장 상태에 그의 진단을 적용하는 것 : 그 자신은 상처받기 쉬운 사진가 였다.” Cartier-Bresson은 예술가로서 가장 서정적인 사진가를 Chim이라고 인정하고  Chim의 온화한 사진적 스타일을 높이 평가했다.  
Chim은 1947년부터 수년간 유럽 전후의 혼란상을 기록하였다. 특히 그가 유네스코의 요청으로 유럽 각국의 어린이를 촬영한 사진은 양적으로도 방대하거니와 질적으로도 탁월한 것이었다. 불행히도 Chim은 1956년 수에즈 전선을 취재하다가 이집트군의 기총 소사에 맞고 최후를 맞았다. Chim의 죽음으로 매그넘이 창립된지 불과 10년이 못되는 상황에서 4명의 창립자 가운데 2명의 창립자 Capa(1954년)와 Chim (1956년)을 전쟁터에서 잃게 된 것이다.

  (2) George Rodger
  북 아프리카와 유럽전쟁에 참전했던 George Rodger는 퇴역 후 종군 사진가로 변신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얀마에서 일본군을 피하기 위해 험준한 산능성과 다름없는 3백 마일의 대나무 숲을 가로질러 강행군할 만큼 강인한 종군 사진가였다. 그는 런던 대공습 장면과 V2 로켓의 위력을 알 수 있는 사진을 찍기도 했는데 1944년 대공습으로 무너진 집에서 먼지에 싸여 들것에 실려 나오는 여인의 사진도 그 중의 하나이다.  
이렇듯 투철했던 종군사진가 Rodger가 시체를 대상으로 훌륭한 프레이밍을 시도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서 영원히 전쟁 사진가의 길을 걷지 않기로 스스로 다짐하기에 이른다. 그가 자기 성격의 잔혹성을 발견한 계기는 바로 나치의 학살에 의해 거대한 시체 더미로 변한 베르겐-벨센의 유태인 수용소 장면을 담은 사진이다. 당시 벨센 수용소의 끔찍한 상황을 수잔 손탁의 말을 빌어 짐작할 수 있다. 작자 미상의 벨센의 유태인 학살 장면 사진을 본 12세의 수잔 손탁은 이 사진을 보고 나서 자신의 인생이 두 부분으로, 즉 그 사진을 보기 전과 보고 난 후로 나뉘어질 만큼 깊은 충격을 받았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Rodger는 창립 회원으로 매그넘을 설립한 후 2년 동안 랜드로바를 타고서 29,000마일의 광대한 아프라카 대륙 여행을 떠났다. 인간의 존엄성과 순수함을 찾아 사진으로 생생하게 담고 삶에 접목시킬 위대한 가치를 찾기 위함이었다. 그의 아프리카 여행은 비참하고 처참한 베르겐-벨센 수용소  광경을 목격한 뒤  삶과 죽음의 문제에 천착한 한 사진가의 고뇌에 찬 작업이었다(사진4).


  3) Maria Eisner & Rita Vandivert
최초의 에이전시 사무실(branch)은 뉴욕과 파리에 두었으나 근래에 런던과 도쿄에 사무실을 개소했다. 이렇듯 매그넘의 급격한 발전에는 숨은 공로자들이 있었다. Maria Eisner와 Rita Vandivert는 사무실 스탭으로 동업 관계로 창립에 일조했다. 그들은 사진가들을 지도, 관리하기 보다는 오히려 지원, 보조하는 역할을 떠맡았으며 사진가가 사진의 저작권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 매그넘의 경우, 사진가가 촬영할 장소를 결정하고 매체 선정을 주도한다.  그 후에 에이전시가 그 사진을 다른 매체에 매매할 수 있다. 예컨대 일단 라이프지에 실린 사진을 에이전시가 전 세계의 다른 잡지사와 거래하는 것이다. 그 결과 사진가들은 실제적으로 그들 자신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프로젝터에 몰두할 수 있으며 심지어 어사인먼트와 관계없이 작업을 진행하기도 한다.
사진가들은 어느 출판사나 편집자의 지시나 의도에 따르도록 강요받는 일없이 독자적으로 촬영계획을 세워 여행하고, 보고, 기록하고, 창작해 오고 있다. 스위스 출신 사진가 Werner Bischof는 매그넘 가입 결정에 앞서 이런 말을 했다. “그들은 자유인이며, 개성이 너무 강해서 특정 매체에 매어 있을 수 없다” 매그넘은 언론사나 출판사로부터 부당한 간섭을 받지 않았고 또 그 집단 자체가 회원 사진가들에게 자유 의지를 보장해 주었다. 사진가들은 그들이 원하는 세계의 어느 곳이든지 스스로 선택하여 가는 것이다.


3.매그넘의 첫 가입자
Werner Bischof & Ernst Hass
스위스 출신 사진가 Werner Bischof과 오스트리아 사진가 Ernst Hass는 매그넘의 창립자들 이후 처음으로 매그넘에 가입하였다. 그들은 리포터의 역할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Bischof는 잡지 매체에 대한 좌절을 불평했다. 예컨대 그가 취재한 인도의 기근에 대해 매체는 극히 적은 관심만을 가졌다(사진5). “나는 거대 매체에 대항할 힘이 없다-나는 예술가이며 언제나 예술가일 것이다” 라고 Bischof은 글을 남겼다. Hass는 전후 유럽의 황폐함을 보도하기 위해 짧은 기간 동안  작업을 한 후, 색과 움직임으로 방향 전환을 했다. 그의 특성은 일상의 세부들-가게 윈도우, 보도, 들 것, 반영물-을 명료하며, 추상적인 색상으로 표현해 내었다. “나는 새로운 것을 촬영하는데 관심이 없다. 나는 사물을 새롭게 보는데 관심이 있다. 이런 점에서 나는 화가와 다름없는 문제의식을 갖고있는 사진가이다. 내가 열망하는 것은 카메라의 한계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 결과 나는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 ”라고 Hass는 1960년에 기술한 바 있다.


4. 매그넘의 성장
 
매그넘이 창립된 지 불과 5년만에 역량 있는 젊은 사진가들이 속속 가입하였다. Eve Arnold, Burt Glinn, Erich Hartmann, Erich Lessing, Marc Riboud, Dennis Stock, Kryn Taconis가 뒤를 이었다.  Arnold는 흑인 이슬람교도들에 관한 기념비적인 사진과 마릴린 먼로를 촬영한 사진(사진6)이 있다. Riboud의 중국에 관한 선구자적인 작업(사진7)은 그의 생애를 흥미 진지하게 만들었던 수많은 여행 가운데 첫 여행이자 첫 작품이다. Riboud는 중국인의 영웅적인 인내심과 중국 대륙의 아름다움을 찬양했다.
Toconis는 알제리 독립 전쟁을 취재했다. 곧이어 Rene' Burri, Cornell Capa, Elliott Erwitt, Inge Morath, Constantine Manos, Wayne Miller 등이 가입했다. 에이전시는 성장해 갔다. Eve Arnold, Burt Glinn, Constantine Manos, Wayne Miller 등은 1960년대 미국의 민권 운동을 기록했다.
뉴욕 시에서 가난한 사람이 모여 사는 할렘 구역을 열의를 갖고 끈기 있게 다룬 Bruce Davidson의 동부 100번 가는 빈민층에 관한 비범하고도 전형화된 하나의 묵상이 되었다(사진8). 그의 작업은 1960년대 초와 70년대 상류층의 인물 사진과 마찬가지로 빈민층에 대한 윤리적, 감성적인 관심을 이끌어 내었다. 1960년대 텔레비젼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사진은 역사적 사건의 장면을 포착하는 능력을 잃지 않았다. 프라하에 대한 소련 공격을 고발한 Josef Kudelka의 사진(사진9)은 동영상과 달리 기억처럼 시간 자체를 정지시킨 것같이 보인다. 이렇듯 훌륭한 사진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고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갖도록 함으로써 역사를 상기시켜 준다.
매그넘의 윤리적 에너지는 미국과 소련의 제국주의적 불행과 범죄 장면과 역사적인 사건을 취재했다. 1971년에 발행된 Philip Jones Griffiths의 베트남에 관한 사진집은 재기 넘치는 냉소가 담겨져 있으며 심지어 미국 정책을 잔인한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 또한  미국 시민 운동(Davidson, Freed 사진10)에서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Berry, Koudelka, Silverstone), 니카라구아와 엘살바도르의 혁명 과정(Susan Meiselas), 북 베트남 전쟁(Riboud)에서 Barbey의 팔레스타인에 관한 초기 작업을 포함한, 6일 전쟁에 이르기까지 매그넘의 사진가들은 역사의 제일선에 서 있었다. 사진가들이 진정 공포를 봄으로써 실제로 고통을 찍을 수 있다면 공포가 중단될 것으로 믿은 것이다. 이것은 반전론이나 인종 차별 철폐를 주장하는 충동도 아니었고 안전지대에 사는 사람들이 위험지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즐긴다는 유희에 대한 단순한 분노는 더욱 아니었다. 매그넘의 사진은 전쟁을 미화하는 것을 부정하고 고통을 감상적으로 만드는 것을 막으려는 노력 가운데 하나이다.  


5. 매그넘의 새로운 모색

1970년대 잡지 매체는 포토저널리즘의 지면을 증면시켜 나갔다. 많은 매그넘 사진가들의 사진이 인쇄 매체의 지면을 장식했다. 그러나 잡지 매체 편집자들은 독자를 좀 더 집착하게 만들고 좀 더 시각적으로 현혹시킬 수 있는 사진을 요구하였다. 또한 그들은 보다 장식적이고 일러스트한 방법으로 사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사진가들로 하여금 표지 사진을 연출하기를, 조명과 색상이 중심이 되기를, 그리고 사진이 독자층의 확대를 꿈꾸는 발행인의 욕망에 적합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래서 니카라구아에서 산디니스타의 혁명을 기록한 Susan Meiselas의 사진(사진11), 북아일랜드와 이란에서의 대 변동에 관한 Gilles Peress의 사진 등 Magnum의 사진가들은 그들 작업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사진집 출판이나 전시회로 점점 눈길을 돌린 것이다. Meiselas의 Nicaragua, Peress의 Telex:Iran, Salgado의 L'Homme en Detresse 등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관한 고도로 세련된 시각적인 해석이다. 사실 다큐멘터리 작업의 주요 채널로서 사진집 출판의 기회가 더욱 많아지고 있다. 사진집의 장점은 잡지에 비해서 좀 더 심도 있는 취재와 좀 더 미묘한 표현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Gilles Peress는 20년 동안 북아일랜드를 취재했다. 라이프에 실린 10페이지 짜리 포토 에세이로 그 작업의 깊이와 각 국면들을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결과 매그넘의 사진가들은 문자와 함께 하는 출판물이나 전시형태를 선호하고 있다. Eugene Richard의 사진집, Cocain blue cocain true(사진12)는 가난하거나 병든 자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사회 그늘에 놓여있는 인간에 대한 고통을 진지하게 그려내었다. 덧붙여, 모로코와 그레나다에서 Harry Gruyaert와 Alex Webb의 작업(사진13)은 사회적인 토대를 알리기보다는 오히려 관찰자의 자의식을 통해 이국향을 강조하였다.
매그넘의 사진 시장은 과거 잡지가 주요 시장이었다. 하지만 이제 범위가 확대되어서 전시회와 책 출판, 상호작용적인 멀티미디어 등 모든 새로운 방법들을 동원해서 사진을 제시하고 있다. 사진가는 전통적인 틀을 따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들의 견해를 자유롭게 표출할 수 있고, 그들이 이미지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사진가는 자유롭게 책을 출판하고 전시회를 개최하며 그들의 비전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인터넷 매체 등 새로운 문화 분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6. 대규모 기획전 ‘Our Turning World’전

매그넘 창립 50주년을 자축하기 위해 기획된 세계 순회전 ‘Our Turning World’는 20세기의 마지막 10년을 기록한 인류의 대서사시이다. 본 전시회는 세기의 전환점에서 동시대 역사를 기록한 사진과 사진가들의 사진미학을 반영한 새로운 작업물로써 418 작품 총451점을 선보였다. Henri Cartier-Bresson의 1999년작 등 매그넘 사진가들의 최근작은 현대 다큐멘터리사진의 새로운 경향을 한자리에서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Our Turning World’전의 사진집인 'Magnum degree‘(Magnum O)의 표지(사진14)는 사진을 가늘게 잘라 모아 놓은 형상이 퍼즐 조각처럼 얽혀있다. 매그넘의 사진가들은 현 세계를 분열된 복잡한 혼란 속에 있는 것으로 그리곤 한다. 냉전시대의 거대한 유물은 남아 있지 않으며 동의할만한 진보적이거나 어떠한 확실성도 없다. 세계는 조각나 있다. 조각난 세계를 기록한 매그넘의 사진가의 사진 조각들은 세계에 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듯 하다. 언젠가 맞출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모아놓은 퍼즐 조각같이 사진을 찍는다는 행위는 언젠가 조각난 시간의 모습이 형태를 드러낼 것이라는 희망, 이 사진들이 언젠가는 우리가 살아온 시간의 비밀을 일부라도 보여줄 것이라는 희망을 의미한다.
1989년은 매그넘에 있어서 의미있는 해이다. 매그넘은 창립 4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 ‘In Our Time’전을 1989년에 개최했다. 이 전시회는 매그넘 사진가들의 초기 작업 부터 88년 까지의 작업을 정리하였다. ‘Our Turning World’전은 ‘In Our Time’전 이후의 성과물이다.
‘Our Turning World’전은 1989년을 세계 전환의 출발점으로 보고 있다. 독일 통일의 상징적인 사건,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중국 대륙의 자유를 향한 함성, 천안문 사태와 공산정권을 해체시킨 루마니아의 혁명 등이 1989년에 일어났다. James Nachtwey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철책을 뜯어내는 손을(사진15), Stuart Franklin은 천안문 광장에서 탱크 앞에 서있는 중국 청년의 모습(사진16)을 담았다.  Leonard Freed는 루마니아 부카레스트 거리에서 유혈 전투 장면을 포착했다. 1989년 이후 우리는 자유를 향한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했다. 제국시대가 끝나고 자결시대가 시작되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무의미했던 전쟁,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전쟁은 분명 막을 내린 것처럼 보였다. 매그넘의 사진가들은 희망적인 자유의 여명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희망의 순간은 너무나 짧았다. 1991년 가을부터 유고의 유혈 분리가 시작되었다. 1992년에서 1995년 사이 Chris Steele-Perkins, James Nachtwey, Gilles Peress, Luc Delahaye, Raymond Depardon 등은 세르비아 군의 사라예보 봉쇄 장면을 촬영했다. 자유에 대한 희망적인 메시지가 인종 청소와 내전 소식으로 바뀐 것이다. Delahaye는 사라예보의 한 병원에서 죽음에 직면한 환자의 모습(사진17)을 담았다. 환자의 한 형제는 죽어 가는 형제의 목을 붙들고 있고 다른 형제는 창턱에 머리를 묻은 채 슬피 울고 있다. 의사는 무력하게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 있는데 여러 갈래의 비스듬한 빛이 의사와 환자를 비춘다. 유고의 분리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중앙 아프리카에서도 분리 전쟁이 발발했다. 상상할 수도 없는 잔악한 민족 대학살이 르완다에서 벌어져 200만 명이 죽어 갔다. 그리고 코소보 사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대규모의 민족 추방이었다. 그곳에도 매그넘의 사진가들이 있었다.
우리는 르완다와 코스보와 보스니아 등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다고 말할 수도 없고 속았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사진으로 투명해진 세상에서 몰랐다는 것은 더 이상 변명 거리가 될 수 없다. 사진 덕택으로, 이러한 사태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사실이 기록될 수 있는 것이다. Gilles Peress의 사진은 차가운 분노에서 영감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그의 사진은 너무 늦을 때까지도 아무도 막으려 하지 않았던 보스니아와 르완다에서의 대량 학살을 기록했다(사진18). 매그넘의 사진가는 그 사실을 몰랐다는 변명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 하지만 전세계는 모두 알게 됐지만 아무런 대처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사진 때문에 인간의 윤리적 상상력은 경험하지 못한 상황까지 확장되는 것이다. 시체가 어떻게 변하는지, 총알이 사람의 몸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피가 눈 위에 뿌려질 때 어떤 모양인지, 혼자 죽어갈때의 감정이 어떤 한지를 상상할 수 있다. 사진가가 전쟁을 막을 수 있고 없고를 떠나 적어도 공포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전쟁 사진을 보고도 행동하지 않은 양심은 우리의 메신저(사진가)를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매그넘의 전쟁의 잔혹성에 관한 기록은 언제나 충분치 않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후세인 우리가 그런 혐오스런 현실이 존재했었다고 믿을 수 있는 것은 바로 Robert Capa가 찍은 사진 때문이다. 오늘날 Nachtwey와 Peress의 사진을 보고 보스니아와 르완다의 현실을 알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진이 지금 바로 사악한 일을 멈출 수는 없지만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사악한 일을 제한할 수 있다. 매그넘의 작품은 역사가 존재한다는 것, 진실은 상대적인 것도 사라지는 것도 아니라는 신념을 드러낸다. 그리고 매그넘의 사진은 망각과의 싸움에서 잊혀지질 않을 증거를 제공한다.    
한편 Our Turning World전에서 매그넘은 세계화가 빚어놓은 부조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세계화는 필연적으로 지역간의 불균등한 발전을 야기시키고 있었다. 옛 것과 새로운 것, 고대의 것과 모던한 것과 포스트모던 한 것을 한 프레임에 병렬시키고 기괴하게 시각화시켰다. 1998년 Marc Riboud는 터어키에서 이슬람 세계의 전통적인 차도르를 쓴 여인이 시장 거리에 세워진 청바지를 입고있는 마네킹을 지나가는 장면(사진19)을 포착했다. Chris Steel-Perkins는 1998년 일본에서 전통적인 본사이 정원 앞에 놓여있는 코카콜라 자판기를 촬영했다. 그리고 평범한 인간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 나아가 미국 마약 소굴의 소름끼침, 유럽의 낭만적인 칼라 풍경, 뉴요커들의 사랑과 분노, 자연에 대한 침잠, 신을 향한 경건함 등 일상성에도 초점을 맞추었다.
형식에 있어서 매그넘의 사진가들은 디지털 비디오 영상이 장악한 영상 세계에 주목하고 있다. Martin Parr(사진20), Lise Sarfati, Constantine Manos, Harry Gruyaert, Susan Meiselas 등은 비디오 세계의 새로운 미적 기준을 그들의 작업에 적용시켰다. 예컨대 중앙에서 벗어난 프레이밍, 거친 입자, 낯설고 기괴한 이미지의 병렬, 사진의 의미맥락을 가능케 하는 요소들의 의도적인 빼내기, 이상하고 비속한 색상 등이다.  


7. 맺음말
   
매그넘은 예술과 저널리즘 사이의 충돌, 초현실과 현실 사이의 충돌 속에서 발전해 갔다. 매그넘은 단순히 전쟁 사진이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전통이 아니었다. 매그넘의 최고작들은 항상 예술인 동시에 기록이었으며 시인 동시에 산문이었다. 현재 매그넘의 사진가들도 현실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표현해내고 있다. 매그넘의 이상은 기록을 예술 단계로 끌어올린다는 한층 더 높은 것이었다. 사진가들은 부조리한 것에 대한 단순 보도가 효율적이다라고 생각하는 이가 많지 않다. 그들은 사진가의 강한 시각이 사실을 왜곡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단순한 사진 기록으로는 제대로 전달할 수 없는 현장적 진실을 풍부하게 드러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설명이 가능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에 관하여 훨씬더 복잡한 생각을 갖고 있다.
매그넘은 사진가 자신이 작품에 대한 통제권을 가진 첫 번째 에이전시였다. 강렬한 자아를 소유한 사진가들을 느슨하게 묶어놓은 단체로써 매그넘이 계속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새롭고 예상치 못했던 것에 문을 항상 열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그넘의 신화는 개인차에 대한 존중과 인류와 세계에 대한 열정과 해석적인 매체로써 사진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출처 : artkiss의 사진사랑 산사랑  | 글쓴이 : artkiss 원글보기